일년일독성경말씀
창세기 24-26장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3장 1-15절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고, 당연히 신앙심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보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구약 예언에 능통한 사람으로 예수님에 대해 더 조사해 봐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낮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자신의 신분도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말을 건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니고데모의 이중적 태도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많은 랍비들 중의 하나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적당히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질문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답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그가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영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겉 모습으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기도하고, 새벽예배하고, 철야를 해도.. 여전히 내 안에 죄성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수십년간 다니며 성경을 읽고 암송해도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궁금증을 가진 니고데모에게 거듭 나야 한다고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 말씀합니다. 실제로 이 표현은 옷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우리의 내면이 완전히 뒤 바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4절에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절에서 예수님은 새롭게 태어남의 근원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제 5절에서는 새롭게 태어남의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물은 여러가지로 해석되지만 저는 침례요한의 침례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거의 죄를 물에 씻는 회개의 침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인간적인 회개와 다짐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해 지고, 나의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같은 일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심을 믿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을 때 그 뱀을 본 자들이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림을 받을 때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존 페이튼 선교사님은 뉴페브리디스에서 사역했습니다. 그곳 주민들에게 “믿는다"는 동사를 어떻게 표현해 주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하루는 사냥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채로 자기 천막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원주민 중 한 사람이 이 모습을 바라보고는, “피곤할 때에는 그렇게 몸을 쭉 펴고 의자에 앉아 푹 쉬는 것이 참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페이튼 선교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믿는다는 개념을 “몸을 쭉 펴고 의자에 앉아 푹 쉬는 것"으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을 사용해서 신약 성경의 “믿는다"는 표현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완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신료를 33키로 정도 가져 와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는 일을 했습니다. 이 일은 엄청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 입니다. “니고데모도 요셉과 함께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일찍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몰약과 알로에를 섞어 만든 향료를 약 33킬로그램 정도 가져왔습니다.” 이후에 성경에서 니고데모를 찾을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궁금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니고데모와 같은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니고데모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에게 궁금증을 가지고 나아가 그 궁금함이 풀릴 때 까지 씨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이 걸린 문제입니다. 왜 주저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