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
출애굽기 30-32장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7장 25-36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담대하게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이 없자 무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당국이 그리스도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일리 없다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가진 정보는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베들레헴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메시아의 고향에 관한 문제는 모든 사람들을 혼동 속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고향은 결국 메시아를 하나님과 연결시키게 됩니다. 그들의 혼동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세개의 짧은 선언입니다. (1) 너희들은 내가 이 땅에 있을 것을 통해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나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이유는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너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그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눈앞에서 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예수님은 예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같이 들어도 어떤 사람들은 더 믿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표적 때문에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은 7장에서 예수님의 충돌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 가운데 재판과 핍박을 경험하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그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의 길을 부인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의 분명한 적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 걸쳐서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일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 서론에서 말씀이 세상 속에서 거절당하고, 그 자신의 백성에 의해 거부를 당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7장에서도 우리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깨닫도록 애쓰고 계시고, 질문 공세를 당하고 계시고, 결국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고 계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복음의 “좋은 소식"이 세상에 전해질 때 그것이 따뜻한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만약 사람이 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만약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충분히 설명되기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이 ‘참된' 기독교인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들이 회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순진한 생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정적이고 받아들이기 잘하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은 종교적 질문을 던지고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척 속이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들은 위장된 속임 수를 쓴 반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출신인가?’ 이 사람은 이 모든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가? 메시야는 신비한 방법으로 와야하는 거 아닌가? 왜 그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가?
종교적 대화에 끼어드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꺼리는 사람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그와 같은 질문을 해 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빛 가까이 다가가서 그 진리를 탐구하고, 어둠의 실체에 대해 질문을 던질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무지와 죄와 고집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거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닌가?’ 당국자들은 그를 그리스도라고 결론을 내렸는가?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 사람 처럼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율법은 모든 사람의 말을 공평하게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이 자신의 동맹군이며,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들이고, 이제 곧 자신을 믿게 될 자들임을 압니다.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동안 예수와 관련된 재판은 계속됩니다.
모든 듣는 자들은 어떤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어떤 ‘편’을 선택할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무엇으로 채워질 것입니까? 분노? 냉소주의? 당국자들에 대한 두려움? 부끄러움? 아니면 용기?
예수님을 믿는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함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