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창 34-36
매일성경묵상
요 4:1-14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절에 보시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기록될 만한 일인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읽으면 유대인들이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했는가? 의문도 드실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지역을 가로질러 갈릴리로 가면 직선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북서쪽 여리고로 돌아가서 요단강을 건너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고 갔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설명해 드리면… BC 900년경 솔로몬왕이 죽은 후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북쪽의 10지파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솔로몬 때 노역으로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회중들이 르호보암을 찾아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왕상 12:4). 르호모암은 백성들의 호소를 무시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리어 두 왕조가 시작합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초대왕 여로보암때부터 본격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엘리야, 엘리사등 많은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는 독특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는데,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여러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주시켜 혼합 민족을 만든 것입니다. 이런 정책은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와해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갈릴리와 예루살렘 중간의 몇몇 도시에만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게 되었고, 그들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힘 없는 사마리아 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들 땅이 부정하다 해서 사마리아 인들의 마을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먼길을 돌아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왕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며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사마리아 인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어두운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삶이 아니라 참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그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곳 우물 곁에 앉아 쉴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때는 12시 정오 쯤 입니다. 이 시각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해가 내리쬐는 이 시각에 물을 길어가기 위해 오물에 나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물을 달라 하시는데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니라.”
이 말씀을 읽으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저는 예수님이 좀 답답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죠…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저는 이해 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필요를 알고 그 여인의 마음을 흔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을 바꿔 줄 “선물”과 “생수"입니다. 이여인은 바로 반응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이 여인은 지금 물 길러 한 낮에 우물에 오는 그의 삶이 힘든 상황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역전시켜 줄 “생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하시고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그 결과는 내일까지 이어집니다. 하지만 오늘 묵상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울림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애쓰고 힘쓰며 우물을 길러 다니지만 세상적인 노력은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만이 우리를 만족시켜 줍니다. 저는 과거에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50이 넘어 경험이 많아 지면서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라는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먼저 채워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찾아 채움으로 늘 만족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