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 성경말씀: 출 15-17장
매일 성경 묵상: 누가복음 7장 18-35절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를 의심하는 요한에게 메시아 사역을 보여주시고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이 '오실 그이' 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왜 요한은 의심했을까요? 제자들을 보내서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요한이 바라는 메시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이 '오실 그이'를 통해 집행될 것을 예고했습니다. 3장 16-17절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렛 설교에서 '주의 보복의 날'을 제외했고, 희년의 복음을 전할 때도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자신이 기다렸던 '오실 그이'가 맞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두번에 걸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이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고, 진행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자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라는 가상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시는 방식으로 요한의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에 나간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로 간 것도 아니라, 무리가 광야에 간 목적은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종말에 보냄 받을 것으로 예고된 선지자 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요한은 엘리야와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고,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요한은 주로 오신 예수님의 전령이었기 때문에 어떤 선지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요한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으로 살던 옛시대와 은혜로 살아가는 새 시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듯이, 침례요한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1세기 당시 침례는 출애굽 사건에서 물을 건너 해방을 경험할 것처럼 이전의 삶을 돌이켜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과 침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행위였으므로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회개의 침례에 참여하는 사람은 요한이 예고한 '오실 그이'가 집행할 성령과 불의 침례를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침례에 참여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침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 역시 29-30절의 내용처럼 예수님과 요한의 사명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이 세대는 시장에 앉아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이 세대는 요한에게 결혼식 놀이과 같은 좋은 반응을 요구했으나, 요한은 금식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장례식 놀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한 죄인들을 환대하고 식사 자리를 만들어 참여한것입니다. 그러자 먹는 것을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라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말하자면 요한과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종교 놀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중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무시하고 비하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이정도 기도하고 신앙 생활 하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여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어떤 반응도 없습니까? 답답함으로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리에 춤추거나, 곡에 우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피리에 춤추고, 그의 곡에 눈물을 흘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반응을 주님께 모였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며 하루를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래 동영상은 예수님의 난해한 말씀 13회 입니다.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한시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한시간 기도운동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매일 한시간이상 기도하면 내 자신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내 주변의 세상이 변할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