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본문: 창세기 46-48장
매일성경묵상 본문: 눅 5:27-39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은 레위를 보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쎄아오마이"라는 헬라어로 사용되었는데 의도적으로 주시하는 동작을 가리키는 동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위 레위를 주시해서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행동 뿐 아니라 그의 마음도 꽤 뚫어 보신 것 같습니다.
레위는 세리로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29절에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리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있다"는 말씀으로 큰 집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부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금을 과하게 추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에 보내야 하는 돈을 징수해야 했는데, 그 돈만 채우면 나머지는 자신의 돈이 되기 때문에 악착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징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이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매국노일 뿐 아니라 불법으로 자신들의 돈을 착취한다는 생각으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주시하시며 본 이유는 그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 받는 것에 대한 불만족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불만족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레위는 기회만 닿으면 현재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길로 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불법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해도 물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레위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후 큰 잔치를 엽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레위의 동료 세리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비방하여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냐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따져 물어야 했지만, 인기가 높아진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없어 제자들을 핀잔 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 모습의 정결함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 (가면을 쓴 사람들) 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먹는 것, 함께 있는 장소 때문에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죄를 코로나 바이러스로 생각하며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죄가 전염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고, 어디에 있는지 중요합니다. 죄가 전염되지는 않지만, 사람과 장소는 우리의 생각을 오염시켜 죄로 물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앉아 있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노라..” 만일 이 땅에 의인들만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죄인이었던 레위를 불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제자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내 자신이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사람을 판단하고 멀리 하려 합니다. 충고를 넘어 정죄하며 마치 나는 깨끗하고 저 사람은 죄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를 제자로 삼아 주시고, 그를 통해 사명을 맡기셨는데 나는 옆에서 저런 사람도? 왜? 예수님이? ..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가지 더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금식은 가장 자기 자신을 들어낼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금식하면 살이 빠지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금욕적인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높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 기도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티 내지 말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금식자들이 누리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금식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남이 하지 않은 것을 비난 하는 것을 금식의 참된 의미를 잃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지금은 하나님 나라 잔치가 시작되었고, 신부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할 수 없다고 옹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에 얽매여 사람들을 비판하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새옷과 낡은 곳, 그리고 포도주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실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혹시 낡은 것이 된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바리새인이 되어 나의 신앙 생활을 들어내기 원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들은 낡은 포도주를 좋아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오늘 본문이 마무리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새 포도주 부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