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열왕기하 5-7장
본문: 요한복음 17장 1-16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문으로 1-8절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기도, 9-26절은 제자들과 제자들로 인하여 믿게 될 성도들을 위한 기도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기도에서 강조하시는 부분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강조하십니다. 17장의 기도문에서만 6번 이 호칭이 등장합니다. 11절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로, 25절에서는 “의로우신 아버지"로 부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친밀한 언어는 예수님의 영성의 표식이 되었고,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아람어 용어인 ‘아바'를 즐겨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우리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특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부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신성모독이라 하며 과민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허락하신 소중한 특권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지 스스로 살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화"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됨"을 요구하셨을 때 의미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의 원래 뜻은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혹은 “찬미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과 승천을 통해서 그가 창세전에 가졌던 영광을 되 찾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도 영화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수치의 자리가 아니라 명예의 자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동기는 자신을 높이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 즉 순종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제공하는 영생의 정의를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적인 “앎"이 아닙니다. 앎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은 경험과 친밀성을 포함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내 자신이 그 앞에서 죄인임을 알게 되고, 내 죄를 대속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삶은 한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지속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을 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테니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인생을 만끽하며 산다고 해도, 사람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는 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만 사라지지 않는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의 접촉이 충만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며, 바로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경험이 곧 영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 만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예수님의 기도는 진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로 인용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친밀하게 ‘아버지’로 호칭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도 살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내어 드리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는 내가 되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