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일독 성경 말씀
민수기 21-23장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12장 1-11절
[요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는 한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두 사건이라고 하고, 또 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향유는 오늘 본문에서 가룟유다가 말한것처럼 비싼 제품이기 때문에 여러번 사건이 반복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에 그 횟수를 최소한 잡아보려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성경에 다르게 기록된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퉁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경우 무리한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각각 어떻게 등장하는지 살펴 보면,
1)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을 때 죄인인 한 여인이 예수님 뒤에 가까이 서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맞추고 그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2) 두번째 사건은 오늘 우리가 묵상한 내용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가정이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나드 한근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
3) 세번째 사건은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유월절 이틀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6장과 14장은 모든 내용이 같기 때문에 한 사건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7장의 사건은 예수님 사역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고, 장소가 독특한 (바리새인의 집)점등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자들 중에는 두번째 등장하는 사건이 세번째 사건과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이 나사로의 아버지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베다니에서 일어났다는 일 외에 동일한점을 발견할 수 없고, 같은 사건으로 보기 위해서는 무리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일은 총 세번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신약 성경 저자는 여인들의 이런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초대 교회 이후로 성도들은 여인들의 헌신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본문의 마리아의 행동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헌신 뿐 아니라 겸손의 모범이었습니다. 모리스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1세기 때에는 연고를 사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특별히 절기 기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향유는 보통 머리에 뿌려졌다. 이 사건에서 특이한 점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는 철저한 겸손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가능한 한 가장 겸손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 특별히 유대 여인들은 자신의 머리를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풀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더욱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을 근거로 과분한 헌신을 강요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인의 헌신은 향유의 가치만 따지면 분명 사치스러웠다는 인정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쏟아 부은 향유는 300일의 노동자 임금과 같다고 가룟유다가 계산했습니다. 시급 15$로 계산해도 36000 달러의 가치가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마리아의 옥합에 든 36000달러 어치의 향유를 단지 예수님을 소중히 하고 그를 높이기 위해 불과 몇 분 만에 쏟아 부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헌신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능력 이상의 것을 바쳐야 그것이 진정한 헌신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의미를 그렇게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를 말리지 않은 이유는 여인들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을 본 받으라며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헌신과 겸손을 세상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도 삼가해야 합니다. 헌신을 헌신으로, 겸손을 겸손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숨겨진 동기는 욕심과 도적질임을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가 의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향한 헌신도 소중함을 깨닫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