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출애굽기 5-7장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5장 30-47절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유월절에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하나님와 동등한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법정에서 2인 이상의 증인이 있을 때 증언을 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하는 박해에 대해서 31-40절 사이에 증거 또는 증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마르투레오라는 단어를 10번 사용하여 증인들을 소환하십니다. 첫째는 침례요한입니다. 침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침례요한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침례요한의 증언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36절에 예수님은 두번째 증거를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표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속에서 이미 증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며 38절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혹은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고발하고 죽이려 한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이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현상에 대해 “영적 질병"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비록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그 마음이 열려 있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못했고, 자신들의 종교적, 철학적 체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9년에 저술한 로마서 주석에서 이 질병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며 운하 옆에 있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빗대어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에게 물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운하가 있었습니다. 운하를 그곳에 적절한 시기에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운하가 산과 사막을 가로질러 건설되는 과정에서 큰 희생들이 치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운하가 말라 버렸다는 것입니다. 운하의 양쪽 벽은 물이 흘렀던 증거를 아직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운하를 위해 일하고, 운하를 보호하고, 그 운하를 만들었던 건축가들과 기술자들의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지만 운하는 단지 역사적 유물일 뿐이다. 운하를 만든 목적은 무언가를 - 물과 생명 - 을 가져오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운하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운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에 두어야 할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운하를 통해 물을 마시는 대신 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노인들은 이야기들을 가장 소중하게 보존합니다. 젊은이들은 열심히 그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각 세대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운하의 참된 비전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운하에 물이 흘렀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교는 생명력을 잃은 운하와 같습니다. 더이상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심히 그 껍데기를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수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가 그런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르트는 스위스와 독일 교회에게 생명력 없는 교회의 모습을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 유물로 남았고, 수 많은 기독교인들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더이상 예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안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생명수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나의 인생, 나의 교회, 나의 전통, 나의 교단, 심지어 나의 성경을 주장하며 예수님이 생명수 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이어왔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납니다. 만약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말라버린 운하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지 입니다. 서로 외형적인 모습으로 싸울 뿐이고 결국 승자 없이 아픔만 남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믿음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안에 생수가 되어 마르지 않는 운하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막연하게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소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말씀을 보면서 이 막연함 보다 먼저 주님께 나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게 지켜달라고 기도를 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악인의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해서 말을 하기도 어렵고, 살면서 나 또한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루를 살아도 온전히 주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막연한 자신감보다
나 스스로 주님께 더 가까이 붙어 있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구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갓피플 닷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