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
열왕기하 21-25장
출 5:1-21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11 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19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 (Marva J. Dawn)이 지은 “고귀한 시간 낭비 - 예배 (A Royal Waste of Time)”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마르다 던의 생각을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광휘에 잠겨"(Immersed in Splendor). 나는 이 말에 담긴 침례 이미지를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여름날 산 속의 사파이어 빛 호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예배 또한 하나님의 무한한 광대하심과 숭고하심과 광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항상 느끼는 놀라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에 "광휘"(splendor)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고귀한" 시간 낭비인 예배가 우리를 하나님의 숭고한 속성과 행위에 잠기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가 모든 종류의 소리, 새 음악과 옛 음악, 찬양의 신실한 샘, 능력 있는 말씀 선포, 끝없이 넓어지며 하나님의 위엄을 전하는 강물로 채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세계의 놀라운 영상과 소리에 묻혀 있더라도 일단 하나님, 곧 우주의 주인이시요 전능의 왕이신 하나님을 언뜻이라도 뵙는다면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두려움과 놀라움은 실로 엄청난 것이기에,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과 모든 삶의 제사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장 되고 위선적인 문화 때문에 하나님의 광대하신 주권과 탁월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분의 광휘를 우리에게 아주 조금만 보여 주시는 데 그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영광이 우리를 삼켜버리리라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개인적인 기호와 시간, 편의와 위안의 문제로 바꾸려는 시대와 문화에 살고 있다. 따라서 주일 아침 예배를 위해 모일 때 가능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나태와 몽유병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광휘를 바라보며 경배와 섬김과 희생으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것은 분명히 고귀한(royal) 시간 낭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는 시간 낭비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예배에 참석해서 얻는 유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예배를 실리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배의 목적은 점수를 따거나 성공한 교회임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데 도움이 못 된다. 우리가 예배 중에 하는 일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느낌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능력도, 자신을 개선할 능력도 전혀 없는 언제나 무기력한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와 긍휼과 은혜와 인자가 넘치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신다.
예배는 시간 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시간 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그 가운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기회,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목적에 들어가게 하는 기회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변화된다. 그러나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집중하고 복종하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출애굽 한다는 것을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주로 동물들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을 신격화 하여 숭배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과 동물을 신격화 하며 숭배했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존재 조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을 보낼 이유가 없었겠죠.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루아침에 빠져 나가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일 하기 싫어서, 게을러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경제적인 낭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바로와 같은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이 아깝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재능은 더욱 아깝습니다. 그 시간에 일하거나 공부하면 더 많은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휘”에 잠기는 경험을 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낀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시간이 결코 세상적인 낭비라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낭비를 거룩하게 여겨 더 적극적으로 “낭비"에 동참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낭비를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