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 레위기 18장 - 20장
매일성경묵상 누가복음 11:1-13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산상 수훈 중간에 위치한 반면에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한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달라는 배경에서 알려 주십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배경에 집중하여 역사적으로 기록하였고,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산상수훈으로 편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르침과 함께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상과 철학을 담은 기도문을 만들어 암송했다고 합니다. 요한이 이루고 있었던 공동체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담은 기도문이 있었고 그와 같은 기도문을 알려 달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결과 주기도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 공동체의 이상과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함께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이상과 교회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등 5가지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몇가지 중요한 점만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해 세상 사람들로 부터 비난 받을 때 입니다. 사람들은 자녀의 행동을 보면서 부모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 교육을 운운하면서 말이죠. 마찬가지로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를 보면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는 판단받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함으로 경건하게 살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다짐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예수 공동체의 철학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핵심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암송했는데, “나라이”라는 말은 주격조사의 옛 표현으로 이 말이 어색해서 대부분 “나라에”로 기도합니다. 나라에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 나라에 계시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완전히 다른 기도문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라에 계시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가운데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짓이 물러나고, 정의가 살아나며,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세상의 군왕들이 통치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간구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양식을 버리고, 하루 먹을 양식을 그날 그날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공급함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침마다 만나를 공급 받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내 곡간에 양식을 많이 보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듯 교만하지 않습니다. 양식이 없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공동체는 하루하루의 양식을 감사하며 겸손함으로 살아갑니다.
넷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도 그렇지만, 이 기도 내용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데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착한 일을 하면 죄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듯해서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람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요아킴 예레미야스 교수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는 헬라어로 과거형이지만 아람어로는 완료형으로서 현재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완료형으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과 동시에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서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를 구함과 동시에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고하며 용서하겠다는 의지함께 들어있는 기도문이 바로 예수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기도문을 알려 주신 다음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버지의 응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9-10절입니다.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응답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wanted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needed 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고 구할 때 성령 충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아침에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기도할 때, 대화 할 때, 길을 걸어갈 때, 운전할 때, 식사 할 때, 잠을 잘 때도, 하나님이 충만함으로 우리와 함께 함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시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