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창세기 18-20장
매일성경본문: 누가복음 2:41-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 주고 싶었을까? 라는 관점으로 생각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49절의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은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철없는 혹은 조숙한 12살 소년이었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없어진 줄 알고 애타게 찾는데 자녀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지만, 당시의 12세는 일년만 있으면 성인식을 하는 어느정도 성숙한 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여자 12세, 남자 13세에 성인식을 합니다.) 13세부터는 회당에서 투표도 가능하고, 의무적으로 유월절에 참여해야하는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어린 아이의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이 랍비들과 대화를 통해서 지혜를 들어내시고,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시며 다른 소년들과 다른 점을 들어냈지만, 동시에 예수님도 보통 아이들처럼 성장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예수님의 “인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간다고 표현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헬라 사상을 가진 데오빌로가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믿는 신은 인간의 습성을 갖고 있었지만,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확실히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십자가 사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흠 없으신 하나님임과 동시에 죽어야 하는 존재가 제물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잘못된 예화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처럼 잠시 계셨다는 설명을 하거나, 때에 따라서 사람이 됐다가 하나님이 됐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삼신론이나, 양태론으로 빠져 예수님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반면, 누가는 있는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신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어하고 설명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설명 하면 할 수록 질문이 생기고, 의문이 더할 뿐입니다. 이는 이 교리가 거짓이거나 모순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신 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우리의 성장 과정을 모두 경험하시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 혹은 기쁨을 체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아픔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프로도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선행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이 사용되는 데에는 배경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항구시설이 아주 나빠서, 큰 배가 들어오려면 몹시 위험하였습니다. 항구 안에도 이곳저곳에 암초들과 모래턱이 있고, 그래서 파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정박하러 들어오던 배가 항구 안에서 좌초하거나 파선 당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그 항구에 익숙한 ‘인도하는 배’를 앞에 세워서 이 인도하는 배가 앞에서 가는 데로 뒤에서 따라오게 하여 무사히 부두에 정박시켰는데, 바로 앞에서 인도하는 이 배를 가리켜 ‘프로도모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9-20절에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그리로 “앞서 가신” 이라는 말씀이 “프로도모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프로도모스 되십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앞서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기쁨으로 전진하는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