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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yeollin
2022년 12월 31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계시록 21-22절 매일성경묵상 요한삼서 9-15절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디오드레베는 알았을까요? 자신의 행동이 2천년동안 교회에서 악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절대로 닮지 말아야 할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아마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의에 사로 잡혀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사도들을 맞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요한을 비방할 뿐 아니라 형제들을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교회에서 내 쫓는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오드레베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먼저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 Diotrephes 라는 이름의 뜻은 주피터로부터 양육 받음 Nourished by Jupiter 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높은 자리에 앉은 그는 으뜸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공동 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 되어 있습니다. “드오드레페가 그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그가 하는 행동은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목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야망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교회의 리더가 되려 했다는 것입니다. 9절 하반부를 계속 읽으면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우리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여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디오드레베는 이방신을 섬기던 자로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면서 교회를 장악하고, 급기야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가 요한의 가르침을 배척한 사람입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 그를 맞아들이지 않은 것을 넘어 사도 요한을 비방하고 요한을 맞아들이고자 한 사람들 교회에서 내쫓는 행동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데메드리오는 뭇사람,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정했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삶이 얼마나 진리를 지키며 살았는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봤을 때 거짓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요한과 전도자들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도자에게 인정받은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 뿐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비춰볼 때, 그리고 사도들이 인정할 만한 신실한 사람이 바로 데모드리오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2년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 사람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평가 받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은 다가올 새해 어떤 모습으로 사시겠습니까? 모두에게 인정받는 데메드리오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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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yeollin
2022년 12월 30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매일성경묵상 요삼1:1-8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요한의 서신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의 서신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요한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가득하고, 온유하고, 자상한 이미지의 사도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이 처음부터 이런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함께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 속했던 야고보의 형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보아너게”라고 부르셨는데, 이 말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별명을 통해 우리는 젊은 시절 요한의 성격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열심, 열정, 야망을 가진 형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초창기에 요한은 때때로 경솔하고 무모했으며, 성질이 급했고, 공격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그는 열 두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마가복음 9:38-41).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꾸짖으시며,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돌아서서 그분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51-55에서 우리는 이 형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을 멸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다시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부족한 마음을 책망하셔야 했습니다. 요한은 야망도 있어서 예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자신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른 제자들과 일시적인 분열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경험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크고자 하는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기록한 유일한 복음서입니다(요한복음 13:1-16).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섬김의 행위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맡길 정도로 청년 요한을 믿으셨고, 요한은 그 책임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부터 요한은 그녀를 자기 어머니인 것처럼 돌보았습니다(요한복음 19:25-27).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를 얻게 해달라는 야망을 보였던 요한은 연민과 겸손을 지닌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그의 후반 사역의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장로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말에서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이오 장로에게 편지합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며 축복합니다. 이를 소위 삼중축복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영적인 축복, 사회적 축복, 육체적 축복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잘 됨”, “잘 되고"입니다. 이 단어는 “유오두스다이"라는 헬라어인데, “유”(잘)와 “호도스" (길)가 합성된 “유오도오"에서 유래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좋은 길로 인도됨', ‘좋은 여행을 함'이란 의미를 갖지만, 은유적으로 ‘번영하다,’ ‘성공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만사가 번영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자신이 왜 가이오를 사랑하고, 그를 마음다해 축복하는지 3절에 밝히는데, 가이오 장로가 진리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형제들을 통해서 듣고 “심히 기뻐"했기 때문입니다.요한이 심히 기뻐한 이유는 진리를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복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이오가 이렇게 진리의 복음을 고수하며 그 안에서 행한 행위를 요한은 한마디로 6절에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가이오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가 가진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 안에서 행함을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사랑의 사도 “요한"이 어떻게 그의 성품이 변했는지 묵상하며, 또한 그가 기쁨이 충만한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는지, 기쁨이 충만한지 반추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늘 하루를 시작할 때 기쁨으로 시작하십니까? 3중 축복을 받는 것도 좋지만,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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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9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계시록 17-18절 매일성경묵상 요한이서 7-13절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본문은 ‘미혹하는 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살펴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요한은 우리가 진리안에 있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미혹하는 자’는 ‘길을 잃게 하다’ 혹은 ‘방황하게 만들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의 어근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미혹하는 자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인데 예수님이 환영처럼 유령의 몸을 갖고 이 땅에 임하셨다며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가현설이 위험한 이유는 인간의 이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합니다. 부활도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려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려 할 때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얘들아… 이렇게 생각해봐~ 너희 아버지는 저희에게는 아버지 이지만, 직장에가면 회사원이고, 할머님 댁에 가면 아들이 되잖니? 이렇게 한분이 세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삼위일체야…” 또 어떤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얘들아, 사과있지? 우리는 사과라고 부르지만, 사과는 껍질, 알맹이, 그리고 씨앗으로 구분 될 수 있잖아? 마찬가지로 세분의 하나님이 각각 존재하는데, 하나로 보이는 것이야..” 저는 선생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중에 이런 설명은 기독교 안에 고질적으로 자리 잡은 “삼신론" 과 “양태론"의 설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예화는 양태론의 설명으로 한분의 하나님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사과의 예화는 삼신론적 설명으로 세분이 한분처럼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태론과 삼신론적 설명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의 지혜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지혜로 예수님을 설명하려 했습니다.그들은, 신적 존재인 예수께서는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그 안에 거하였을 뿐 본질적으로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았고 따라서 죽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 성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단 교회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그 교회 설교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 교회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저는 그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분이 도대체 어떤 설교를 듣고 이단에 빠졌는가 궁금해서 저도 설교 몇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의 주장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 맘대로 짜집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치 성경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 없는 종말론적 설교로 성도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성경을 꿰뚫게 해 주겠다. 의문나는 것을 알려 주겠다. 제대로된 복음을 전해 주겠다. 등으로 접근하여 자기 지혜로 해석한 이단적 요소를 전하는 적그리스도가 아직도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스스로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스스로 점검해 보고, 굳게 서서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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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yeollin
2022년 12월 28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계시록 14-16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이서 1-6절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한이서는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이 지역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로서 AD 90년경에 기록됐습니다. AD 90년경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함께 했던 사도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간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성도들이 주를 이뤘을 때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은 로마 제국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에 널리 전해졌고, 가정 교회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흥왕함과 동시에 거짓 교사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 이단도 세를 떨쳤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은 성도들을 미혹하여 실족시켰습니다. 당시 복음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섬김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순회전도자로 위장한 거짓 교사들은 여러 교회를 다니며 거짓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순회전도자 중 어떤 이를 환영하며 강단에 세워야 하고, 어떤 이는 허락하지 말아야 할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졌던 사도 요한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단의 도전을 물리치고 교회를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펜을 들어 요한이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진리와 사랑을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3에서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했습니다. 진리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에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까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내 안에 사랑이 충만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사도 요한은 지금 “심히 기쁘도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안에 있습니까? 참 진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행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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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yeollin
2022년 12월 26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계시록 10-13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5장 13-21절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여러분,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 또는 그런 의식'을 말합니다. 사전적 정의와 같이 어떤 절대자에게 비는 행위가 기도라고 한다면 종교와 믿음을 떠나 인간은 모두 기도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의 기도는 세상에서 정의하는 기도와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호흡"이라고 말 할만큼 삶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 뜻을 알아가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기도의 행위중 극히 일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그 뜻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며 들으심이라.”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바로 즉각적인 응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5절에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구한 그대로 얻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구하는 바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 즉각 응답, 보류, 거절 등으로 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친밀함을 유지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나의 구할 것을 아뢸 것입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 시간과 하나님의 응답 방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에 가장 낙망하기 쉬운 자이다.” 뮬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분의 방법대로 이루어 주심을 확신했습니다. 뮬러가 고아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거의 매일 이루어졌지만, 그의 삶 가운데는 오래 기다린 기도들이 많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아원을 새로 건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한지 400일이 지났다, 그 분께서는 나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고 계셨다.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분이 정하신 시간에 도와주실 것을 반드시 믿는다.” 뮬러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뿐 아니라, 그 분의 방법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환난 속에서도 결국에는 유익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시기와 방법은 인간의 계산과 생각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뮬러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400명의 새 고아들을 수용할 새 고아원을 개원하였다. 이것은 내게 굉장히 귀중한 일이다! 왜냐하면 매일 7년 동안 기도를 드린 후에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복은 결코 우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온 결과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응답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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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6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 요한계시록 6-9장 매일성경묵상 요일 5:1-12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은 5장 1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는 완료시제입니다. 이 시제가 중요한 이유는 시제에 따라서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 하반부에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4:21을 반복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낳으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는 '낳다'다는 의미의 동사 '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낳으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죠. 또한,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은 단수형입니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적으로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합니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인간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재채기, 가난 그리고 사랑" 이라고 합니다. 재채기 참기 어렵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숨길 수는 있어도 가난 한 사람이 가난을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도 마찬가지죠. 사랑의 표현 방식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랑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빛, 손길, 말투…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사랑이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전혀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 서로 싸우고, 음란한 삶을 살고, 급기야 배교하여 교회를 떠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 사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사람을 존경하며, 그 사람을 닮아가려 노력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으로 끝없는, 변함없는, 충성된 사랑을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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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4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계시록 1-3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4장 1-10절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저는 어릴 때 아버님께 회초리를 맞으며 성장했습니다. 학교 성적이 저조했을 때, 형과 싸웠을 때,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아버님은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렇게 회초리로 맞고나면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빠가 너를 때리는 이유는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저는 아버님의 이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종아리에 피가 맺혀 여름에 반바지도 못입도록 회초리를 드신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말씀이 제 귀에 들어올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을 이해하지 못하여 중고등학생때는 아버님과 서먹해진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버님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셨고, 저 또한 아버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아직 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아비가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사랑이 이해 됩니다. 아버님은 제가 바른길로 가기를 원하셨기에 회초리를 드신 것입니다. 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바른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아버지된 심정으로 에베소 지역의 교회 성도들에게 본문에서만 4번이나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간곡하게 애원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을 볼 때 그들이 악의 길로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아비된 마음으로 간곡하게 세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분별하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안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설파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별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라”는 단어의 의미는 ‘시험하라’(test)입니다. 이 ‘시험하라’는 단어는 금속의 순도와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서 금속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금속공학자의 용어라고 합니다. 순금(24K)에도 불순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순도 표시의 최고는 100%에서 0.1%를 뺀 99.9%로 표기합니다. 금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금이 섞인 광석이 들어오면 용광로에서 녹이며 불순물을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순금이 되기 까지 3개의 용광로를 통과한다고 합니다. 금은 1000도 이상씩 3000도 이상의 고온을 극복해야 순금이 된다고 하는데, 순금을 얻는 과정은 끝임없이 분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순금을 만들 때 광물이 수천도의 온도를 통과하듯이 완벽하게 시험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조금의 의심이 있다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더 높은 온도로 분별하여 불순물을 털어내야 순수한 복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디에 속했는지 분명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4절에 보면 요한은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속했다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은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값을 치루고 사신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자녀가 옆집 자녀처럼 행동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옆집 밥이 더 맛있다고 그 집을 기웃거리고, 옆집 아저씨 말을 순종하며..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했는지 분명히 알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랑이라는 속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 가득 나타나야 합니다. 요한은 아비된 심정으로 그들을 권면합니다.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기쁨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들어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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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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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2, 3서, 유다서 매일성경묵상 요일 3:13-24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가 기록되고 읽혔던 시대에는 영지주자들이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와 함께 육체적 욕구들은 악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인 욕구들을 절제하는 것을 신앙적인 삶으로 오해하는 경향이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잠을 줄이고, 말을 적게하며,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경건한 삶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원론적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의 모습과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중적인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요한은 답답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건져주시고 주님의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방식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세가지 방법을 말하는데, 첫째, 예수님과 같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면 도와 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셋째,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같은 사랑의 실천이 가능할까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할까요?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모든 일에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요한은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을 때 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형제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목숨까지 버리며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완벽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던 그 존재로 회복된 것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교회 십자가는 많은데 사랑이 없다는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 만큼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잘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실천해 보는 성탄절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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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2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요한일서 1-5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3장 1-12절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한은 1절을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1절을 다시 원어에 근접하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2절에서 우리가 종말의 때에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연약하고 흠이 많고 부족하지만 다시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주님을 닮아 완전한 몸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서 거룩한 삶을 살았듯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3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죄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의 죽음, 죄성에 사로잡혀 세상을 탐하는 옛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를 짓지 않고 주님처럼 거룩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게 됩니다. 요한은 죄를 짓는 자들은 그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고 못박습니다.(6절)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는 앎이란 ‘관계’를 말합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앎’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죄를 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8절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다시 죄를 지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 6장 15절에서 강력하게 외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그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10절)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주 안에 거하며 나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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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0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베드로후서 1-3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2장 12-29절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체성이 변했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외인에서 자녀로, 이방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이 변했다고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완전해 진 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완전한 모습으로 천국 백성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이 편지를 읽는 에베소 지역의 성도들을 세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호명합니다. 첫째는 아이들입니다. 14절에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아이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년의 단계로 가야 합니다. 12절에 요한은 청년을 부르면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합니다. 청년은 아는 수준을 넘어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14절 하반부에 청년들을 부르며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그들을 칭찬합니다. 여기서 청년은 물리적 나이로 20대의 청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장하여 악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비들을 호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았다고 하지만,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아는 지식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강조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단들은 한번 믿었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요일 1:8, 10). 또한 계명을 무시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요일 2:4, 11). 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들도 있었는데요.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 가면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이단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비들”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확실히 경험했었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아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했었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경험적인 앎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아이, 청년, 아비가 있어야 하고, 각자의 역할을 알고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있는지요? 몇년씩 교회를 다녔지만, 여전히 아이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악과 싸우는 모습은 있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할 수 있는 아비의 모습은 없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안에 거하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주안에 거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하루하루 성장하여 아비의 모습으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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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9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베드로전서 1-5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2장 1-11절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리트머스 종이를 처음 봤을 때 친구들끼리 엄청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리트머스 종이는 산과 염기를 구별해 주는 종이로 빨강색과 파란색이 있습니다. 빨간색은 염기가 강한 물질에 반응하여 파란색으로, 파란색은 산성이 강한 물질에 반응하여 빨간색으로 변합니다. 리트머스 종이는 산과 염기를 단숨에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단번에 구별할 수 있는 세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진짜 신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문자적으로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지 아닌지 극명하게 구별해 주는 리트머스 종이가 됩니다. 둘째는 6절의 말씀처럼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세 주, 즉 주인과 구원자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셨나요? 낮아지셨고, 섬기셨고, 복종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셋째,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9절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 속의 어둠이 미워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존재 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리트머스 종이가 있다면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리트머스 종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이런게 어디 있어? 라며 화를 내고 거부하겠습니까? 물론 세상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여러분의 믿음을 실험 할 수는 없습니다.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거짓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불안하거나, 꺼림직 하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읽으시며 삶을 점검해 보시고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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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야고보서 1-5장 매일성경묵상 요한일서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 1서의 저자는 책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비교해서 읽으면 구문과 어휘, 주제의 전개가 유사해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이 요한 1서의 저자임을 전통적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요한 1서를 기록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에 가해진 박해가 심해지면서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에베소에 정착하여 이방인들 중에서 사역하는 중에 공동체의 일원들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가 경쟁적인 집단을 형성하자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어 교제를 지속할 것을 격려하고 떠난 자들을 비판함으로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요한 1서를 쓴 것입니다. 이런 위기는 에베소 주변 교회들 안에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이단적인 교훈을 조장한 분파가 발생하여 시작한 것인데 학자들은 이 이단적 교훈을 가현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현론자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혈육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되었고, 그 뒤로 기적을 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때 그리스도가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고 부활했지만,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이단 분파는 공동체를 떠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지 않은 그들의 실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 교훈이 여전히 신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모든 거짓을 일소하고 신자들을 복음에 대한 순전한 초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특성을 강조하며 “태초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는 왜 예수님을 “것” (that which was from beginning)으로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좀더 포괄적인 표현으로 사도들이 알고 경험하게 된 “생명의 말씀”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듣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만나는 것으로 말하는데, 그의 독자들이 듣고 있던 거짓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생들은 예수님의 육체가 정상적인 몸이 아니다, 또는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요한은 그가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으며, 그 경험으로 예수님에 관해 아는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누구에게 소개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신학을 공부하여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7절의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22년 남은 10여일간 요한 1,2,3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연말에 많이 바쁘시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2023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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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7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히브리서 11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11장 1-10절 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네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라는 말씀에 고개를 갸웃 거리게 됩니다. 떡을 물 위에 던지면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지?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은 아까운 음식을 버리는 행위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말씀이 난해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는 가장 먼저 다른 번역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이 난해한 말씀으로 그냥 두었다는 것은 원문의 단어나 문법을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때문에 다른 번역본을 읽으면 조금더 명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쉬운 성경은 “씨앗을 물 위에 던져라.” 공동번역은 “돈이 있거든 눈 감고 사업에 투자해 두어라.” 새번역은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현대인의 성경은 “너는 물질을 후하게 나누어 주어라.”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된 이유를 찾기 위해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은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 “레헴” 즉 ‘떡’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이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의미가 무엇인가? 즉 해석의 문제가 남게 됩니다. 학자들도 우리처럼 떡을 물위에 던지라는 본문의 말씀이 쉽게 납득 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의견이 제시 됩니다. 첫째, 이는 상업적인 말로 배가 먼 항해를 마치고 그 이윤을 얻어 돌아 올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상품들을 계속 바다에 띄우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이 이에 따른 번역을 했습니다. 둘째, 이는 농업에 관한 말로서 곡식의 씨앗을 촉촉한 땅에 뿌려 추수 때에 풍요로운 결실을 얻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쉬운 성경이 이와 같은 해석을 따른 것이죠. 셋째는 식물을 인간 생명의 씨앗으로 보며 성적으로 방종한 자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자선 또는 구제 생활을 권면하는 말로서 남을 위해 선을 베풀고 쌓으면 이내 좋은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이 이에 따른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지만 저는 2절의 말씀과 연관하여 넷째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자는 앞에서 자연, 지혜, 인생 등의 허무를 언급한 후 여기서는 사람이 사는 인생 동안 남을 위해 선한 일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떡을 물위에 던지는 것은 음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공급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베푼 음식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수 있고, 누구에게든 재앙이 임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나눔으로 재앙을 모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눔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눔으로 서로 부족함을 채울 때 서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짧은 가사를 반복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서 시작했다는 찬양입니다. 입술로 찬양하여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고자 다짐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눔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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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5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시편 68-70편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10:12-20 12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15 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16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7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8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20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이불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창피하고 후회되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싶을 때 사용하는 신조어 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서 이불킥 하고 싶었던 상황이 없는지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가 입으로 자신의 우매함을 들어냈던 순간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유식함을 나타내기 위해 아는 척 했지만, 무지함이 들통 났을 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말 했을 때, 우월감을 나타내고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을 했을 때.. 등 많은 이불킥 순간들이 생각나면서 1절의 말씀처럼 “입술이 자기를 삼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감추기 위해서, 잘못한 행동을 무마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앞뒤 사정 보지 않고 뱉어내는 말들은 결국 스스로의 우매함을 들어낼 뿐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로운 말을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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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3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히브리서 3-4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9장 11-18절 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13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그가 경험한 두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세상 일들이 사람의 예측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빠른 경주자가 선착하는 것, 용사들이 전쟁에 승리하는 것, 지혜자들이 음식을 얻는 것, 명철자들이 재물을 얻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가 생각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때와 기회가 동일하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리기를 잘 하지 못합니다. 중.고등학교때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선착순 10명” 하면서 운동장 한바퀴 뛰라고 할 때 저는 미리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죽도록 뛰어도 10명 안으로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선생님은 하필 제가 제일 못하는 달리기로 체벌할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이 갖는 기회가 시기가 가기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는 체육시간에 기회를 얻어 일등 할 수 있었지만, 저는 또 다른 면에서 기회를 잡아 그 친구들 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자가 한 성읍을 구해도 그가 가난하다면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들어나는 현상으로 실체를 파악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실체를 감추려 합니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자신은 골프장에 갈 때 자기 차 절대로 가져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차는 작기 때문에 골프장에 가면 무시 당해서 외제차가 있는 다른 친구차를 얻어 타고 간다고 했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가능하면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허상으로 꾸민 겉 모습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혜가 무기도다 낫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능력이 있느냐? 자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기와 우연이 나쁘게 임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면 시기와 기회가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두 전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생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되는 대로 살지 뭐. 그럭저럭 살다가 가지 뭐." 솔로몬의 의도가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대학 입시를 앞 둔 수험생이 "붙을지 안 붙을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공부 안하고 손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앞날을 알지 못하니까 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니까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면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의의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도 이런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속에 즐겁게 살아가시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12월 14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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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2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히브리서 1-2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9:1-10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오늘 본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배경으로 전도자가 제안한 것으로 비록 죽음은 인생의 한계이지만 사는 동안에 주어진 삶 가운데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조언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는 말은 죽음을 포함하여 여러 사건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닥친다는 말입니다. 즉, 선인과 죄인,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그 누구라도 죽음과, 질병과, 자동차 사고 같은 것이 똑 같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잘 믿는 농부의 밭이나 믿지 않는 농부의 밭에 비가 똑 같이 오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러한 사실 자체를 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다는 뜻입니다. 전도자는 한 단계 더 나아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평생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발견한 것은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 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악인마저 동일하게 죽음으로 마쳐진다는 사실이 전도자에게는 심히 악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개는 매우 천박하고 멸시 받는 대상의 상징이고, 사자는 품위 있고 존경 받는 대상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천하고 경멸 받는 사람이라도 귀하고 존대 받았던 죽은 자보다는 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7절에 산 사람들을 향해서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라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았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몫을 (음식물이나 의복 등) 기쁘고 즐겁게 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하라’는 말도 삶을 즐겁게 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0절에 ‘일을 얻은 대로 힘을 다하여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인생의 낙을 누리기 위해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장차 들어 갈 스올(다른 번역: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 지식, 지혜 같은 것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올은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지하세계 즉,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들은 우주를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로 보았다고 합니다. 스올은 바로 땅 아래로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 침묵의 장소 그리고 망각의 장소 등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최선을 다해 일하고, 주신 것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지만 공평한 것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사람은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첨단 과학과 의술이 발달 되어도 죽음을 영원히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다음으로 공평한 것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지금은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전도자는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 앞에 놓인 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 안의 진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은 가장 공평한 것 중의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일조차 미래 어떤 결과를 갖고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의인과 악인,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가 모두 똑같다고 했나 봅니다. 세상만사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존재들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신 분을 우리가 감히 감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심을 다하여 그분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죄인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장점과 강점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단점과 약점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 앞에서 오직 정직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아시는 그 분께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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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2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8장 9-17절 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세상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이 세상 이치여야 할 텐데… 세상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가장 확실하게 실현 되어야 하는 교회 안에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잊혀질만 하면 목회자들의 성폭행 사건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헌금 유용, 담임목사직 세습 등의 이야기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작은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해 잘나가는 교회, 대형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런 교회들은 더 그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하나님과 성도님들을 섬기며 정직하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은 오히려 가난하여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형편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널려 있는데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12절 앞부분의 말씀처럼 “악인은 백번이나 죄를 짓고도 장수”하는 경우도 있고, 14절의 말씀처럼 “악인들의 행위를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데에 마음이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제대로된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악한 일을 담대히 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악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솔로몬은 그가 깨달은 또 한가지를 말합니다. 그가 아무리 알려고 노력해도 그 누구도 해 아래서 되어지는 것을 다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지혜를 얻고, 사람들의 수고를 알고자 밤낮 자지 못하며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17절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혹 지혜로운 사람이 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 질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도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 우리는 마치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내가 다 통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는 척 하며 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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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9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디모데전서 4-6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7장 15-29절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26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27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솔로몬은 그가 사는 날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수 많은 것을 가지고, 수 많은 것을 깨닫고, 경험했지만, 결국 세상을 보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악행에도 장수하는 의인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일을 지나치게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의인이 되려 노력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 악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교만해 집니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될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려 합니다. 지나치게 우매하면 나 자신 뿐 아니라 주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멸망합니다. 단지 우리는 나의 무지과 악함을 인정하며 내 안에 선함을 쫓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있음을 믿고 의지할 때 무지함에서 지혜로움으로, 악함에서 선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9절에 솔로몬은 그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고 말합니다. 우리는 선하게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 정체성을 잃지 말고,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어릴 때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평범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싫었고, 다툼의 현장이 싫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어짜피 우리 삶이 평범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면 꿈이라도 “대통령”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봅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평범하게, 평화롭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더 충만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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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8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디모데전서 1-3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7장 1-14절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11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절을 보면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 즉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좋은 기름’이란 중근동 지방의 감람나무 열매에서 추출되는 값비싼 향유를 가리킵니다. 이 ‘좋은 기름’은 당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피부의 건조를 막는 의약품으로, 호화로운 연회나 귀한 방문객을 환영할 때, 성전의 불을 밝히는 등화용으로, 여성들의 화장품으로, 또 사람을 장사하는 데 사용되어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표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렇게 귀한 향 기름보다도 아름답고 풍성한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아름답고 좋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말하는 “좋은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의로운 삶을 살아 냄으로 인하여 얻게 된 복되고 고귀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이름은 이름 자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불려지는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성호”라는 이름이 좋은 이름 아니라, “성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사람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불려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좋은 이름으로 불려지기 위해서 어떤 마음 자세로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솔로몬은 1절 하반부터 “끝”을 준비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앞에서 슬퍼하며, 출생을 축하합니다. 장례식에 가는 것보다 출생을 축하하는 자리를 더 좋아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은 죽는 날이 더 낫고, 초상집이 더 낫다고 했을까요? 우리 모두는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한 것이죠. 우리는 죽음을 보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고, 죽음 뒤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안다면 우리의 삶을 조금 다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름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기름을 몸에 부어도 몸은 썩을 수 밖에 없지만 이름은 남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떻게 불려질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며 승리하는 하루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12월 9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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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yeollin
2022년 12월 08일
In 매일성경묵상 (2022)
일년일독성경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3장 매일성경묵상 전도서 6장 1-12절 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10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지난주 수요일에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달라스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요일부터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미열도 있고, 몸살 기운이 심해서 주로 호텔에 누워있다가 금요일에 잠시 여동생과 조카들을 보고 토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코로나 자가 검사 키트로 검사해보니 양성이 나왔습니다. 그 뒤로 방에 갇혀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방으로 전달 받고, 시간 맞춰 타이레놀을 먹으며 코로나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몇일이 지나고, 어제 저녁부터 증상이 호전 되는 거 같아 오늘 오전에 혹시나 싶어 다시 검사해 봤는데 여전히 양성이 나오네요… 코로나가 사람 바다 다 다른 증상이 나타나지만, 저는 열은 높지 않고, 후각과 미각도 있지만, 심한 몸살을 앓는 듯합니다. 몸은 아파도 매일성경 묵상을 계속 나누고 싶어 책상위에 앉아보지만, 몸에 힘이 없어 그런지 오래 집중해서 하기가 어려워 성경만 읽고 기도한 후에 다시 눕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져서 말씀을 몇번 읽고 주신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합니다. 특히 1절에 보시면 “내가 해 아래에서 한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더 갖고 싶은 욕심에 걱정 근심이 쌓여 마음이 무거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경우는 고대 근동에서는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죄의 무게가 쌓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걱정 근심 뿐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의 무게를 보며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하십니까? 2절부터 더 읽어보면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지고 100명이 넘는 자녀를 소유해도 사람이 불행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루하루 의미있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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