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 1-10절 묵상
일년일독성경말씀
예레미야 45-48장
매일성경묵상
갈라디아서 1:1-10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늘부터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묵상합니다. 갈라디아는 한 도시가 아니라,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중앙에 위치한 로마의 한 주를 지칭합니다. 신약에서 언급된 갈라디아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BC275년경 침략한 켈트 족이 정차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북쪽 지역이라는 설과, BC25년 로마인들이 갈라디아 주를 만들 때 덧붙여진 남쪽 지역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남쪽 갈라디아설을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북쪽 지역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사도행전 13-14장에서 남쪽 갈라디아의 도시인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볼 때 남쪽 갈라디아설이 유력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은 1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중에도 열심히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입니다. 목숨의 위협이 있었지만 바울은 1차 전도여행 귀환 길에 이 지역을 다시 방문하였을 뿐 아니라 2차와 3차 전도여행 중에도 이곳에 들려 그들의 신앙을 더 굳게 만드는 애정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도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애정을 가진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의 방해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와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이 가르쳤던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문제 삼아 율법의 준수와 할례의 시행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할례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습니다. 바울 반대자들은 바울이 이류 사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도'란 말은 ‘보냄 받은 사람'이란 뜻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파송된 최초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바울이 사도권이나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반대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드로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같은 “최초의" 사도들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1절에서 밝힙니다. 그의 사도권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2절에서 혼자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편지한다고 밝힙니다.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은 바나바와 안디옥에서 온 다른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바울은 1장에서 자신의 신뢰성과 사도직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다른 사도들 및 중요한 교회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후 6절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합니다. 6절에 보면 “이같이 속히 떠나"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군인이 탈영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등을 돌려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굴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다시 종교의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구원 받으려면 이런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우리 규칙을 따르고, 우리 방식으로 침례 받고, 우리 예배를 꼭 참석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하나의 가정을 설정하여 율법 주의가 얼마나 은혜를 왜곡하는지 그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과장법을 통해서 은혜와 율법을 썩어서 선포하는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영원히 그리스도가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저주를 다시 한번 반복하며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빼놓아서 복음을 희석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 행위를 어떻게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율법을 100%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겉으로 들어나는 행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범하는 죄도 다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드는 어떤 유혹에도 현혹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귀한 하루 영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