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찬양
돌아서지 않으리
일년일독성경말씀
예레미야 7-9장
매일성경묵상
시편 64:1-10
1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5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6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7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8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10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오늘 본문의 표제어에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의 노래, 공동체의 고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표제어에 다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 시편이 언제 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을 무너뜨리기 위한 악한 사람들의 음모, 화살 같은 말을 볼 때에 63편 처럼 이 시편 역시, 다윗 인생에 가장 큰 위기였던 압살롬의 반란 때에 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이여’라는 말로 입을 엽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근심’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묵상’, ‘기도’, ‘간청’, ‘불평’, ‘수심’, ‘원통’ 등으로 번역됩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마음속에서 자신의 온 삶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을 짓눌누는 것은 ‘원수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을 구입하기도 하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간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2절입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대적들은 다윗을 잡기 위해서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다윗을 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어떤 일이라라도 저지를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겨주시고, 감추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대적들의 모략은 갈수록 독해집니다. 3-4절입니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다윗은 ‘칼’과 ‘화살’이라는 직유법을 사용하여 대적들이 저지르는 언어의 잔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을 가는 것처럼 혀를 연마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주 교양 있는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게다가 독이 잔뜩 발린 화살촉과 같은 말을 계속해서 쏘아댑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은 혼자 하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악한 일에는 ‘공범’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하는 일이 꼭 나쁜 일만이 아니며, 또 자기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일은 혼자서 행하는 것보다 집단적으로 행할 때에 더욱 대담해져서, 악을 행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오히려 상대를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악을 저지르면서 ‘서로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악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래 ‘올무(올가미)’를 놓았다고 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묘책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높게 평가 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서로 이간질 하는데 스스로 잘한 행동처럼 말합니다. 스스로 높이 평가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7-8절에 보시면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다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3절에서 다윗의 대적들이 자기 혀를 칼같이 날카롭게 갈았고, 화살처럼 독한 말로 상대를 겨누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화살이 ‘갑자기’ 날아온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 ‘아주 빠른 속도로’라기 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뜻합니다.
다윗의 대적의 핵심에는 신하였던 아히도벨과 아들 압살롬이 있습니다. 특히 아히도벨은 전략이 뛰어난 신하였습니다. 그의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삼하 16:23)”고 말씀하니다.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이 후새의 이야기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후새는 다윗 편이였는데 압살롬 편으로 위장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후새가 말한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이었지만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압살롬의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에게 갑자기 화살을 날리신 것입니다. 그 후 압살롬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 편에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에게 화살을 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찬양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9-10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악을 행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로 피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비록 맨 발로 다윗 궁에서 쫓겨 나갔던 다윗이었지만, 끝까지 이 소망을 붙들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우리 앞에 시련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의인은 결국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흔들리지 않고 돌아보지 않은 삶 살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