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설교
히브리서 9:23 - 9:28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견유 학자라고 알려진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줄테니 말하라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를 바라보며 햇빛이 비치도록 비켜서 달라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디오게네스를 다시 찾아갔는데, 디오게네스가 인간의 뼈 몇 조각을 놓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없는 것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당신 아버지(필립대왕)의 뼈와 그의 노예들의 뼈의 다른점 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알렉산더 왕에게 죽으면 누구든지 모두 똑같은 뼈로 변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왕의 뼈든 평민의 뼈든 모두가 같아서 구별조차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얼굴도 다르고 옷 모양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말씨도 다르고 권력도, 부도, 지식도 다르다가 죽으면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뼈조차 찾을 수 없는 흙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왕의 아버지나, 노예나 다 죽는 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을 피해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다 압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직면하게 되는 죽음이지만 모두가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죽음을 맞이 할 수 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2000년전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복음의 핵심이고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는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에서 해방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않든 간에,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게 설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희생제물"이라는 것이 그 답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들어 올려 십자가로 가져가사 거기서 내가 죽어야 마땅할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것은 나의 죽음이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의 죽음은 더 이상 나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죄는 담당되었습니다. 나의 죄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치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왜 죽습니까? 죄의 극심한 참혹함에 대해 이 세상에 존속하는 증거로 죽음을 남겨두시기로 하나님께서 뜻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에게도요. 우리는 죽는 것을 통하여 세상 속의 죄의 외적 효과를 눈에 보이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정죄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물론 뒤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심판은 옮겨 졌습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나 구원받는 자들에게도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따라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냥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코람데오의 자세입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무슨 말과 생각을 할 때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당회 때마다 과열되어 언성이 높아지고 발언이 격해지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회실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모든 발언의 내용을 녹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자기의 모든 발언이 녹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당회원들의 언성이 낮아지고 격한 발언이 줄어들었습니다.
사람은 녹음기 앞에서만 서도 반듯해 집니다. 하물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을 기억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늘 그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반듯해지고 아름다워 지겠습니까?
1863년 링컨이 새해 벽두에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 일로 인해서 링컨은 괴한에게 피살 되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흑인들의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바친 것입니다. 흑인들은 평생 아브라함 링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링컨이 땅에 묻힌 뒤 수년이 지났습니다. 남부에 있는 대 농장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가 알라바마에 있는 어떤 흑인을 붙들고 물었답니다. "당신은 링컨을 압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링컨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링컨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이 해방된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무식한 채 내버려 둬라. 가르치지 말라. 그리고 일만 시키자.' 이것이 노예 주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여전히 죄의 노예로 살아가게 합니다. 시기, 질투, 미움, 두려움 등에 얽매여 사랑, 용서, 화평, 온유 등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면 심판은 형벌의 두려움의 심판이 아니라 상 주시는 축복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열린교회 성도님들.. 우리 모두는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충성되게 하루를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