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4일 새벽예배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막6:14-29)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시고, 제자들도 보냄을 받고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기 시작하며 예수님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루살렘의 헤롯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헤롯 왕은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고 말합니다. 헤롯 왕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롯 왕은 침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침례요한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여기에 침례요한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소개하는데 내용이 참람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대왕의 큰 아들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을 합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 거꾸로 헤로디아가 주도적으로 남편인 헤롯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티바스와 재혼한 건지, 또는 정략적으로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침례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했습니다. 침례요한은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침례를 받던 상황이어서 사회적으로 인기가 있었는데, 이런 침례요한의 말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헤롯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했습니다. 사실, 요한의 비판을 헤롯보다는 헤로디아가 더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따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 했습니다. 헤롯은 침례요한을 가만 두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아마 여론이 잠잠하면 다시 풀어줄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헤로디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번 기회에 요한을 죽이고자 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의 딸이 헤롯 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춤을 추었는데 왕이 너무도 기뻐서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로디아는 상상하지도 못할 요청을 하게 하는데 침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호언장담한 헤롯은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의 머리를 베라고 명령을 내렸고,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한 시위병이 피가 흥건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얹어 가져와서 살로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참 비참한 사건입니다. 입에 담기도 싫은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마가를 통해서 이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게 하셨을까요?
첫째는 침례요한이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초대 교회안에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있었고 사도행전 19장 24절에 등장하는 아볼로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침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침례요한을 어떻게 기억하냐 하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의 사역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회의 불의와 맞써며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헛된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불의한 사람들에게 정의를 외치다 죽은 침례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롤 모델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불의한 헤롯에 맞서는 침례요한을 기억하며 그들은 불의한 로마 황제의 핍박을 견뎠고, 앞선 선구자 역할을 한 침례요한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 기억하며 그의 삶을 본 받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로,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세계는 헤롯과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현대 사회에는 헤롯과 헤로디아처럼 함부로 사람의 목을 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과 헤로디아가 보여준 인간 본성은 지금도 그대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결혼이라는 신성한 제도를 악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듣기 싫은 말을 했다고 해서 권력을 휘둘러 사람의 목을 쟁반에 담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싫어하는 것을 없애려고 하는 마음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은 21세기 인류와 문명을 어떻게 보십니까? 2천 년 전과 지금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요? 겉으로는 달라진 게 많은 것 같지만 사람의 속성은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파괴적이고, 위선적입니다. 겉으로 친한 척하면서도 가슴 속에는 비수를 품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된 것처럼 보여도 21세기 문명 역시 계속해서 선지자들의 목을 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계획을 세우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무늬만 달라질 뿐이지 근본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직접 나서서 무얼 바꿀 수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무력증에 빠지기도 하고, 개인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세월아 가라, 하는 식으로 머물러 있으면 될까요? 저는 그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악의 승리로 보이는 이 세상 안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하나님이 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여러분의 영적인 시선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의와 평화에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시선이 밀착해있지 않으면 우리는 충만한 삶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헤롯이 판치는 세상에서 힘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침례요한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길을 열어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하셨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맥체인 성경통독
출애굽기 25장, 요한복음 4장
잠언 1장, 고린도후서 13장
오늘의 암송 요절
C-2 성령
고린도전서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사순절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