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레위기 11-14장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9장 13-23절
[요9:13-23]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이웃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자를 바리새인들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14절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바르고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태도로 정죄하며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되어 논쟁이 가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분쟁속에서 소경은 점점 그의 믿음이 자라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었던 자에게 다시 질문하자 이번에는 그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던 앞의 경우와는 달리 “선지자였음이 분명하다고" 대답합니다. 소경이었던 자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분이라는 것을 알 길이 없었기에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 최고의 자리에 예수님을 올려 놓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고백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에게 증언을 듣고자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소경이었던 자가 이제 보게 되었으며 그 사실은 의심할 수 없었지만,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질문에 부모는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라는 답을 합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곧 바로 부연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부모는 이 논쟁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22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22절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가 성장하면서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이 말씀은 후대에 첨언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이미 예수님을 적대시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두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왜 예수님은 또 안식일에 맹인을 고쳐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베데스다 표적 이후에 적대적 분위기로 유대지방에 가기를 꺼려 하셨는데 왜 굳이 안식일에 또 이런 치료 사역을 하시며 갈등을 고조시키셨을까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는데, 안식일은 경직되고, 권위적이고, 아무것도 못하고, 어떤 일을 할 때 눈치 보고.. 그래서 힘들어하는 날이 아님을 보여 주시고자 함입니다. 참된 안식은 눈을 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들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낌으로 참된 안식과 회복을 경험하는 날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안식일에 맹인을 고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님들이 주일에는 장 보면 안되나요? 주일에는 뭐 사먹으면 안되나요? 라는 질문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일들은 토요일이나 평일에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은 가능하면 쉼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안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가족이 함께 장보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평소에 만나지 못하는 분들과 즐겁게 식사하며 교제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면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일을 나누며 논쟁하고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내가 이러려고 안식일을 줬나?”라는 자괴감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안식일은 구약의 개념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킬 필요 없다고 안식일 무용론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안식하고,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주일 오후에 소그룹 모임을 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소그룹 모임을 준비하는 가정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다 말고 집으로 달려가 음식을 장만합니다. 소그룹 모임이 끝나면 월요일부터 직장 출근해야 하는데 피곤함으로 한숨을 쉬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의무를 행하려다 오히려 안식을 못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듯 합니다. 사실 무 자르듯이 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준은 있습니다. 쉼과 회복이 있는가? 기쁨이 충만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이 것만 생각하면 우리의 삶에 안식이 충만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둘째로, 왜 눈 뜬 사람의 부모님은 사실을 말하기 주저했는가? 라는 점입니다.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살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부모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을 없을 텐데 왜 부모는 모르겠다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을까요? 물론 바로 뒤에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합니다. 부모님은 출교가 두려웠기 때문에 아들의 치유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과 간접 경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옆에서 예수님을 통해 변화 받은 사람을 지켜 보는 사람은 신기해 할 수는 있지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위기가 닥치면 자신의 믿음의 밑 바닥을 들어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