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7일 새벽예배
에스겔(Ezekiel ) 23:1 - 23:21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아시는지요? 이 단편 소설에 천사 미하일이 나옵니다. 천사 미하일은 하나님이 한 영혼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것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가지 숙제를 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를 알아 오라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 인간계로 내려온 미하일은 알몸으로 차가운 길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구두방을 운영하는 시몬과 마트료나가 대접하는 것을 보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두 방에서 일하면서 어느 귀족 신사가 1년을 신어도 끄떡없는 구두를 주문했지만 그가 곧 죽을 것을 미하일 자신은 알았기에 구두 대신 슬리퍼를 만들었지만 구둣방 주인 시몬은 그가 슬리퍼를 만드는 이유를 모르는 것을 보고, 미하일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육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자각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미하일은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부인을 보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는 단편 소설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래, 사람의 마음에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 사람은 내일 죽을 것을 몰라,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야 해.. 그래 이 세상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선택하는 삶을 지켜보면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보다는 내 생각대로 내 편리함으로 살아갑니다. 겸손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영원한 삶을 기대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영원할 것처럼 내 것을 만들고, 쌓고 쾌락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나의 잣대로 상황을 판단하며 눈앞에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라고 우리에게도 물어본다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물질 보다는 영적인 것을 말하고, 무형의 가치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선택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잘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유다 백성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인도하셨고, 땅도 주셨고, 살아갈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 제시해 주셨지만, 유다 백성의 삶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을 계속 말씀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두 자매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고발하십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오홀라의 뜻은 그녀의 장막이라는 뜻이고, 오홀리바는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오홀라는 북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오홀리바는 남유다를 상징합니다. 장막은 거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안에 거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주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 신들, 이방 백성들을 거주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는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오홀라가 왜 앗수르 사람을 선택했습니까?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보기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6절). 영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대적자요 우상숭배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눈이 닫혀 있으니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오홀리바가 왜 갈대아 사람에게 현혹되었습니까? 언니 오홀라 처럼, 화려한 의복과 높은 직위와 준수한 용모에 반했기 때문입니다(12절).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을 빼앗기는 재앙을 만났습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창3:6).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일 설교 때도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를 통해 배우겠지만, 여호수아는 크게 힘써 지키고 행하라고했습니다. 크게 힘써 지키지 않으면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너무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닐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막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오홀리바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