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14-21절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4-16절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에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고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시며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며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18절부터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메시야가 할 일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참고 이사야 44:1-4)
17절에 “이는” 은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 앞의 내용을 뒤의 내용이 뒤받침 할 때 사용합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행동은 자신의 뜻이 아닌 이사야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예언하신 일들이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결코 갑자기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상의 의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순간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던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해 이뤄진 것임을 마태복음은 구약의 예언서들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체코의 단편 영화가운데 MOST (다리)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도개교(다리 일부분이 열려 큰 배가 지날수 있게 한 다리)의 근무자인 아버지와 아들은 비록 여유롭지는 못하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빠는 어느날 방과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으로 마중을 나가 학교에서 나오는 아들과 함께 일터로 향합니다. 아버지의 일터인 도개교에 도착, 아들은 근처 강가에서 낚시를 하라고 하고 아버지는 강가에서 낚시하는 아들이 창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근무에 들어갑니다. 다리를 통과하려는 화물선의 요청으로 전기 스위치를 눌러 육중한 다리는 모터의 힘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집니다. 덩치큰 화물선은 들려올려진 다리의 교각 사이로 빠져나가고 모든 일은 순조로이 흘러가는 듯합니다. 그 순간 아들은 다리건너에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발견합니다. 기차가 예정보다 너무 빠르게 다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작업실쪽에 계실 아빠를 불러보지만 기계를 점검하러 망루의 자리를 비운 아빠는 대답이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수백명을 태운 기차가 다리아래로 그대로 추락할 상황입니다. 그 순간 아빠 역시 뒤늦게나마 달려오는 기차의 검은 연기를 발견합니다. 순간적으로 망루에 있는 작업실에 달려와 스위치를 조작하려하는 순간, 창밖을 내다본 아버지는 강가에 있어야 할 아들의 모습이 안보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기차가 달려오고 있는 다리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다리 상판 아래에 다리를 들어올리는 기계장치쪽에 덮개가 열려있고 그 곳에 상체를 넣고 있는 아들의 다리가 잠시 보이다가 기계안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아들을 살리자니 기차를 탄 수백명 승객의 목숨에 눈을 감아야 합니다. 기차의 승객을 구하자니 다리를 내리기 위해 기계를 그 안에 떨어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시키고 많은 사람을 구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 많은 사람을 살기기 위해서 아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개교에서 일하는 아버지처럼 순간적인 선택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을 알고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알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계획을 아는 것은 때로는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보여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죽이고자 모의하는데, 당신의 사역을 줄이지 않습니다. 그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길이 넓고 편한길이 아닐 지라도 주님이 가라 하신 그 길임을 확신하며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