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14-22절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 난해 한 본문이라, 제가 참고했던 신문 기고문을 편집해서 올려 봅니다.
본문 말씀을 좀더 정확히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참 수긍하기 어려운 난해한 말씀입니다. 일부 비평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계명 가운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을 무시하는 말씀이라며 비난하기도 했고, Fitzmyer와 Liefeld 같은 일부 주석학자들은 해석하기를, 먼저 언급된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키며, 나중에 언급된 죽은 자들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본문의 배경과 1세기 당시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해석의 실수가 있습니다. Byron McCane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세가지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위의 해석은 본문에 기록된 제자의 요청에 적합한 해석이 아니란 것이다. 마태복음 8장 21절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제자의 요청을, 죽은 부친을 장사해야만 하는 아들의 도의적 책임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헌신 사이에서 나온 제자의 갈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내가 먼저’ 라는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라는 말을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부친을 장사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는가’ 라는 일의 우선 수위로 생각했기 때문에 비롯된 해석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부친을 장사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예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제자의 요청대로라면, 그는 일정한 기간을 채운 후에 돌아올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석에는 제자가 요청한 시간의 설명이 없습니다.
두 번째,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 이란 부분을 간과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언급된 앞서 죽은 자들과 나중에 죽은 자들을 서로 다르게 구분하였습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영적으로 죽은 자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란 말로 해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그들의 죽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의 죽은 자들’이란 이미 죽어 가족 무덤에 안장된 자들의 친족 관계나 동일한 상관 관계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지, 영적이나 육체적인 죽음을 구분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두 죽은 자들 모두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세 번째 일반적인 해석의 실수는, 1세기 당시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 유대 장례 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것이 확실하면, 즉시 시신을 가족 무덤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습니다. 장사 기간을 하루 이상 넘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장사는 죽은 당일, 또는 장사 지낼 수 없는 밤에 사망했으면, 다음날 장사를 지냅니다. 결코 두 밤을 넘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21장 22, 23절의 모세의 율법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즉시 장사한 예는 성경 몇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요 19:31)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행 5:6-10)입니다.
예수님의 한 제자가 부친의 죽음 소식을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었다면, 그가 돌아갈 즈음에는 이미 부친의 장사를 끝났을 것입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장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은 자의 시신을 오래 두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세기 당시 유대 사회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석은 이런 유대 장례 관습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 유대 장례 절차
가족은 가족 중의 누군가 죽으면, 시신을 즉시 무덤으로 옮겨, 세마포로 싼 후에 가족 무덤에 안장합니다.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파서 만든 바위 무덤 안에 시신을 안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죽은 자를 기억(이즈코르/ izkor)하며 일주일을 애도 중에 보냅니다. 이 애도의 일주일을 쉬브아(shiv'ah)라고 부릅니다. 가족은 7일을 슬퍼하며 지내지만, 그렇다고 장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상을 당한 가족은 한 달간 공적인 모임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한 달 중에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이 있을지라도 회당이나 성전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족은 죽은 자가 1년이 되는 날에 다시 무덤을 찾습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육체는 모두 썩어 뼈만 남게 되는데, 가족은 죽은 자의 뼈를 돌로 만든 석골함 (Ossuary)에 담습니다.
시신에서 육체가 모두 썩으면, 뼈를 모아 석골함 (Ossuary)에 담습니다. 뼈를 석골함에 담는 날은 슬픔에 잠겨 있지만 그러나 다음날은 기뻐합니다. 기뻐하는 이유는 죽은 자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모든 의무로부터 놓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Moed Qatan 1:5).
죽은 자를 위한 장례의 마지막 절차는 죽은 지 1년이 되는 때, 뼈를 모아 석골함에 담는 의식입니다. 이 장례 절차를 ossilegium 또는 두 번째 장사 (secondary burial)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한 제자는 이런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장사 지낸 당일부터 두 번째 장사가 있기 전까지의 필요한 시간을 요청한 것입니다. 짧게는 몇 일에서 길게는 10개월이나 걸리는 긴 시간입니다. 사실 제자의 죽은 부친의 하루 장사는 사망한 그날, 즉시 끝났습니다. 제자가 염려한 것은 죽은 부친의 당일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가족 무덤은 한 사람을 위한 일인 무덤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 또 대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바위를 파서 만든 가족 무덤입니다. 이미 소개한 장례 절차에 따라 무덤에 안장되어 썩어가는 시신도 있을 것이고 뼈만 남아 석골함에 담겨진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가족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배경에서 풍유적으로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랍비 문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육체가 뼈로부터 부패되어가는 것을 죽은 자의 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장례의 마지막 단계인 뼈를 석골함에 담는 ossilegium 의식을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의 잘못된 장례 제도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해 지는 것이지 다른 어떤 방법, 곧 육체가 썩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나 기타 여타의 방법을 통해서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 9:22, 26, 행 4:12, 엡 2:8-9).
결론적으로 부친의 장사를 요청했던 제자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은 유대인의 장례 문화와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보라. 너는 죽은 네 부친을 즉시 무덤에 안장했던 것으로 부친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 행하였다. 이제 너는 네 부친의 육체가 다 썩기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것으로 모세의 율법 준수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죄가 사해지는 것도 아니다. 너는 이미 죽은 부친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 행하였으니,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네 죽은 조상들이 네 죽은 부친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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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거에 이 글을 읽기 전에 이 본문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장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장례 문화를 무시하고,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시간을 소비하는 비 성경적인 문화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우리의 발목을 붙잡은 사회적 의무와 문화가 있습니까? 그것을 무시하지는 말아야겠지만, 그것에 얽매여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열린교회는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이지만, 사회에 얽매이는 교회는 아닙니다.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도 힘을 내서, 복음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하루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