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11:1-9)
오늘 본문은 바벨탑 사건으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아 본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가지 입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시각으로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창세기 주석서로 불리는 주전 2세기 유대교 문서 쥬빌리서도 (The Book of Jubilee)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으로 이해하였습니다. (Jubilees 10:22). 기독교인 어거스틴도 (Augustine, City of God, Book 16, Chapter 10) 바벨탑을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행위” 라고 해석하였고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과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vol. 1) 루터도 (Luther’s Works, vol. 2,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6-14) 바벨탑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차원에서 창세기 주석을 하였습니다. 탑을 높이 쌓고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일 뿐 아니라 높아 지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함을 그대로 들어내기 때문에 이와같은 전통적인 해석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해석도 있는데, 바벨탑은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로 보는 견해입니다.
크로에오토와 (J. S. Croatto, “A Reading of the Story of the Tower of Babel from a Perspective of Non-Identity,” In Teaching the Bible: The Discourses and Politics of Biblical Pedagogy [1993]: 203-23) 데나 놀란 페웰은 (Danna Nolan Fewell, “Building Babel,” In Postmodern Interpretation of the Bible – a Reader [2001]: 1-15)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의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로서 바벨탑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바벨” 이라는 단어는 바벨론 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전 8세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고 6세기는 바벨론 제국의 지배 아래서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노략당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관점에서 제국을 심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창세기 저작 연대를 바벨론 포로 이후로 산정하기 때문에 받아 들이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좀 독특한 관점인데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기원” 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관점입니다. 번하드 엔드슨과 (Bernhard W. Anderson, “The Tower of Babel: Unity and Diversity in God’s Creation,” I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Old Testament Perspective [ 1994]: 165-78) 테드 히버트는 (T. Hiebert, “The Tower of Bable and the Origin of the World’s Cultures,” JBL 126/1 [2007]: 29-58)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의 성서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 11장 9절b, 표준새번역) 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문화와 언어의 다양함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해석은 새롭습니다. 히버트의 주장에 의하면, 바벨탑 이야기는 “한 언어”를 사용하고 “한 문화”를 고집하는 인간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배푸시는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갈등의 해결을 심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축복으로 볼 것인가? 히버트의 바벨탑 해석은 창세기 1-11장을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으로 읽어오는 전통적인 창세기 주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히버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창세기 9장에서 끝났고 창세기 1-9장을 편집한(?) 저자 (아마도 P) 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라고 명령하시는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절의 말씀이 창세기 10장에 실현되었기에 (노아의 자손의 족보)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는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세상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 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번째 세번째 주장은 그냥 참고로 이렇게 성경을 해석 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볼때 사람들은 모이면 높아지려 노력하고 하나님 없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를 보더라도 교회가 잘되고 성장하면 꼭 이름을 높이고자 노력하는데 그 결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것은 언어가 달라서 일수도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같은 말을 사용해도 전혀 다르게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오래전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읽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탑을 높이 쌓아 힘을 보여주거나, 높이 쌓았다고 이름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일 뿐 아니라 공동체가 흩어지는 지름길 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예수님을 닮아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서로를 위해 격려와 기도로 충만해 지는 교회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맥체인 성경읽기
창세기 15장, 마태복음 14장
느헤미야 4장, 사도행전 14장
오늘의 암송 요절
디도서 3장 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