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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마가복음 14장 1-11절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잡아 줄일 계획을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한 여인, 그리고 예수님을 넘겨 주려 대제사장들을 찾아간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무리들 사이의 한 여인의 행동이 도전을 줍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어떤 동기에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나드 한 옥합의 가격은 일년 연봉과 비슷한 300데나리온쯤 되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 품삯)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귀한 것을 허비하는 이 여인을 책망합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사람들처럼 이 여인을 책망하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을 것입니다. 실용주의, 합리주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비싼 향유를 한 사람의 머리에 쏟아 부어버리는 이 여인의 행동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반응이 주변 반응과 상반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을 칭찬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전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남기십니다.

이 본문을 읽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위해서 그런 돈을 쓰는 것을 장려하는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이 여인처럼 헌신(헌금) 하는 것을 독려하는 말씀으로 사용할 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며… 이 본문을 우리의 관점과 수준과 논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가룟유다가 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돈을 허비하는 예수를 팔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룟유다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도전이 있습니다. 여기서 향유는 한 여인 전부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이 아니라, 자신 전부를 예수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여인이 자신을 들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듯이 여인의 손을 잡고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받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니라 자신 전부를 예수님께 드린다는 서약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로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이 여인의 행동이 함께 증거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일주일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성금요일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며 무엇을 예수님께 드리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모습으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금식, 기도, 새벽예배, 절제하는 모습.. 그러나 그 어떤 모습이든지 그 안에 내 전부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 전부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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