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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일



마태복음 26장 17-35절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본문은 유월절 첫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중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폭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은 몹시 근심합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했던 운명공동체인데 이 그룹에서 배신자가 나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건의 예지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아는 것보다 예수님은 그들은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을 팔지 안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알텐데 예수님께 오히려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사실 빵 그릇에 손을 넣는 것은 모두가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함께 식사하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 것임을 함축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이 누군지 확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유다는 표정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자기는 아닌 척 하며 여유롭게 빵을 떼고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질문 까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알아 듣도록 “네가 말하였도다" 하십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직역하면 ‘네가 스스로 말했느니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속으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가룟 유다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을 판 것이 들킨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미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했기 때문이죠. 보통의 경우 가룟 유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라며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고, 예수님이 배반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멈추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이미 사단의 계략에 자신의 영혼까지 팔았기 때문이죠. 이순간 가룟 유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수치심도 없습니다. 은 삼십에 모든 것을 넘겨 준 상태이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는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납니다. 기어이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적으로 가룟유다의 행동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는 것 아십니까? 논쟁은 이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가룟 유다의 배반을 통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도 일정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있었고, 가룟 유다가 실제 그런 역할을 했다고 답변한 것이 바로 '유다복음서’입니다. 학계에서는 1700년전에 쓰여진 유다 복음서가 발견되었다고 난리 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적 사고 방식으로 유다를 재 조명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도 않고,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책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교리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이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드릴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문제 자체에 예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풀면 풀수록 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만 붙잡고 이 문제를 이해합니다. 가룟유다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의지도 분명히 있었고, 기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가룟 유다가 아니더라도 이 당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질문이 일어납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십자가 사건 때문에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빌라도도 그렇고 유대 지도자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까?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않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 수행했다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일이 없었겠죠. 혹은 인류 모두가 선한 선택을 하며 살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필요 없었겠죠. 하지만 그들의 선택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 했고, 누군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유다나, 종교지도자들의 선택을 옹호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잘못된 선택도 옹호 받고 싶어하는 그릇된 동기에서 나온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제 머리로 예정론과 자유의지의 딜레마를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분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악용해서 자신의 뜻을 이뤄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도 그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어.. 나 아니었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도 못했어” 라며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며 선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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