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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0일







[욥7:1-21]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엘리바스가 퍼 부은 정죄에 대한 반론과 하소연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욥은 모든 것에 불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달은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희망이 없이 보내는 구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등등…

이러한 욥에 태도에 대해서 김기현 목사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오늘은 김기현 목사가 지은 “욥, 까닭을 묻다"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중심으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삐딱한 욥의 말은 나름 근거가 있다. 하나는 창조론이다. 세상은 정확하게 창조 세계를 역주행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통은 선한 창조가 정확하게 전복된 상태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뒤바뀌었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고 산다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 없는 존재도, 고통 없는 인생도 없다. 일그러진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일순간에 바다 괴물로 만든다. 또 나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게끔 만든다. 욥은, 이렇게 될 거면 뭐 하러 세상을 만들었냐고 따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론이다. 인간은 바람같이 왔다가 그냥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찮은 존재인데, 그런 인간이 죄를 지었다 쳐도 그게 하나님께 뭐 그리 대수냐는 것이다. 또 자기같이 미미한 존재가 죄를 짓는 것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세계 운영과 진로에 무슨 영향이나 미치겠느냐는 것이다. 설령, 열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고난을 받을 만큼 죄지은 것은 없지만, 백 번 양보해서 자신이 이런 고난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신다면 용서하셔야지 왜 자꾸 단죄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욥은 세 친구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죄로 인해 무지막지한 고통을 받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바다 괴물로 인식하신다는 말이 된다. 파스칼의 말에 따르면, 욥의 이런 반항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15]


욥이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무와 같다. 뿐만 아니라 욥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짐승과 같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듯이,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욥은 개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위대하다. 물론, 파스칼은 균형을 맞춘다. 파스칼은 위대한 참된 종교란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과 함께 비참하다는 모순되어 보이는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투정어린 탄식은 신앙없는 사람의 넉두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속에 허우적 거리며 헛된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 죄 때문이야… 라며 단순한 결말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과 씨름하지 못하는 신앙인인척 하는 삶이 아닌, 고난 속에서 밤새워 하나님과 씨름하는 욥이야 말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고통속에서 헛된 인생임을 고백하며 참된 하나님의 큰 섭리를 발견하는 몸부림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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