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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ncyeollin

2023년 1월 31일




마태복음 6장 19-34절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귀하게 여김 받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염려될 때는 내 스스로가 참새보다 귀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요? 마태복음 10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머리털을 세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부분을 섬세하게 인정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일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고, 존귀한 가치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염려를 극복하지 못한 자들은 탐심을 가지고 물질을 쌓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또,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고 탐심을 갖는 자는 중요하지 않는 것에 (비 본질적인것)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목숨을 위하여 먹는 것이고, 몸을 위하여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가 있냐 하면, 무엇을에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입을까?를 생각하며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 지도 중요합니다. 무엇을 입을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우리가 하는 염려는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부분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염려, 근심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염려하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래도 보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염려에 사로 잡히면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을 때 염려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능력을 생각해 보시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에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그의 통치하심을 믿으며 구하며 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들은 열심히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그들이 발견해서 먹는 먹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새들은 집을 짓습니다. 그들이 짓는 집의 재료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스토트 목사는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아 날아 다니는 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과 새들의 협력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새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의 성과의 기준도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무조건 많이 벌고, 세상은 무조건 많이 찾이하는 것이 그 기준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공부해서 남주냐? 라는 관점으로 공부하고 일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은 공부해서 남주자는 관점으로 일하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테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 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입니다. 우리도 이런 별명을 붙이는 것을 자랑 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티테디오스 성호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티테디오스 자기이름 한번 불러 부십시오. 티테디오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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