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창세기 46-48장
매일성경묵상
요 4:43-54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국립공원을 가다 보면 수 많은 사인판이 등장합니다. 몇 키로 남았다는 표시도 나오고, 국립공원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표시도 나오고, 국립공원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광고 판도 등장합니다. 이런 표시판 자체가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국립공원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가는지 알려주는 유용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특별히 표적이라고 표현했는데, 표적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번째 표적이 등장합니다. 두번째 표적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가나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변하여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자기들도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술합니다.
예수님은 조금은 환영 받는 분위기에서 가나에 이르십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는 왕의 신하로 그의 아들이 어떤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왕의 신하라 하더라도 당시에 의술은 낙후되어 있어 고칠 방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올라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부터 그를 찾아가 청합니다.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영기서 청한다는 말은 헬라어에서 미 완료형 시제로 사용하여 “계속적 동작”을 의미합니다. 왕의 신하는 간절함으로 계속해서 예수님께 청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복수로 왕의 신하를 의미하지 않고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과연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 보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은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의 또다른 표적과 기사를 기대하며 모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수님은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한탄 스럽게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만 오신다면 아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십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약 20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가면 하루 종일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서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런데 내려 가는 길에서 집에서 오는 종들과 만납니다. 종들이 아이가 살아 있다 합니다. 아이가 살아나는 시간을 물으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그 시각과 일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후 그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두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고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만 고칠 수 있는 의원이 아니라 먼 곳에 있는 사람도 고칠 수 있는 하나님 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두번째 표적은 표적의 위험성도 함께 알려 주십니다. 표적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표시판임이 분명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적만을 구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모든 것인 것처럼 신기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그가 예수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슈바이처는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쩌면 표적이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정작 예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 고통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등안시 하며 예수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행하는 그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단지 기적을 보거나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경험하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