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말씀
열왕기상 15-17장
눅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오늘 묵상 내용은 과거에 했던 설교를 편집 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둘이 슬픈 기색으로 엠마로오 가는 길에 일어난 일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에 눈이 가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려졌다는 단어는 헬라어 ‘크라테오’라는 동사의 수동형 사용되었는데 크라테오는 영어로 Hold, Seize 라는 뜻으로 그들이 눈이 어디엔가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But their eyes were holden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어디엔가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예수님의 죽음에 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실 때 글로바가 대답합니다. 그런데 글로바의 대답의 요점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3절에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24절에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죽음에 잡혀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옆에 있어도 볼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17절 하반부에 보시면 예수님이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고 말씀합니다. 흠정역 (King James Version)은 조금 다르게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것들이 무슨 대화이기에 너희가 슬퍼하느냐?”고 번역했습니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의 질문 안으로 가져 왔습니다. 번역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느낄 정도로 슬퍼하며 대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슬퍼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We had hoped”라고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속량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속량은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그들을 속박하고 있었던 로마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줄 자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쫓았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슬플 수 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소망없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5절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먼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믿음 없음을 지적하셨고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고,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떡을 취하고, 축복하고, 떼고 나눠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엠마오로 가던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첫째는 수동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집니다. 31절에 보면 어두웠던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밝아졌다는 헬라어는 디아노이고라는 단어로 ‘열다’라는 뜻을 가진 수동형 동사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할 때 그들은 눈이 수동적으로 잡혀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그 잡혀있어 어두웠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밝아진 것은) 그들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내포합니다. 그들은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서 풀어주다는 단어도 ‘열다’ 라는 디아노이고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을 열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된 것도, 마음이 뜨거워진 것도 그들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쳐가려 하셨을 때 예수님을 강권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두 번째 변화는 능동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만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리는 은혜는 전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 받은 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시로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가던 길의 방향을 돌립니다.
그들이 돌아간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이 붙잡히신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건이 벌어진 곳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예수 시체 증발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 받으며 수배 받을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과 행동이 변화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혹시 눈이 가리워지고, 슬픔으로 엠마오로 가시는 분 있다면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뜨겁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