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야기 6
일년일독 성경 말씀
사무엘상 17-20장
매일 성경 묵상
누가복음 19:28-48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입성 하실 때 예수님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이유는 첫째, 예수님을 통치자(왕)로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 10-11절은 통치자의 나귀가 묶여 있다고 묘사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이제 왕으로 오신 이가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도록 나무에 묶여 있는 나귀를 풀어온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주’로서 나귀 ‘주인들’에게 나귀를 요구하는 것은 왕의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인들의 질문과 행동을 예고한 장면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강조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9:9 절에서 예고한 왕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스가랴는 시온에 오는 왕이 겸손하기 때문에 나귀를 탄다고 선언했습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세상의 승리한 왕은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나귀는 달릴수 없기 때문에 겸손의 상징일 뿐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겸손한 왕으로 이 땅의 주인 되시는 평강의 왕 되심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겸손한 평강의 왕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예수님이 마주한 현실은 왕으로 대접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와서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환호 소리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환호성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서 나온 므나의 비유에서 귀인이 왕위를 받고 오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뚫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42-44절은 예루살렘에 대해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은 두가지를 알지 못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방문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했지만, 예루살렘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심판의 비극이 닥쳐올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애통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 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구축한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집은 이권을 챙기를 종교 강도들의 보물 저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성전은 가난하고 곤궁에 처한 자들의 피난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회복을 위해 장사하는 사람들은 내어 쫓으시고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층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과 백성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반면에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경제적 권리와 정치적 힘을 빼앗을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힘과 능력이 있는 분이지만, 군림이 아닌 죽음, 영광이 아닌 수치의 십자가, 선동이 아닌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이땅에 실현하는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겸손과 평화를 이루는 삶,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삶.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하루 되기를 원합니다.
사순절 27일차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