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말씀묵상: 레위기 15-17장
매일성경묵상 누가복음 10:25-42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너무 익숙한 두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시험한다는 단어는 “에크페이라조”로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 뜨리기 위해 성경을 의도적으로 잘못 인용했을 때 예수님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율법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습니다. 율법사는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으로 꼬투리를 잡고자 함입니다. 이런 의도를 아시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 보십니다. 책을 읽는 방법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양창삼 목사님이 요약한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를 요약한 아래의 내용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을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법은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로 이는 ‘텍스트를 사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내용을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율법에 대해서 잘 알았지만, 율법의 내용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28절에 예수님은 그가 율법을 읽는 자세를 간접적으로 지적하시며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면 자신을 돌아보며 깨우쳐야 하는데, 율법사는 그동안 옳게 살아온 듯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은 끔찍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이방 사람들은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인들은 야곱의 자손들로 12지파를 같이 이루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혼혈이 되었다는 이유로 경멸의 눈길로 피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만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읽고 적용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충격적입니다. 착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운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부정하다 생각하여 피한 강도 당한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자기 돈과 시간 그리고 이웃사랑의 모범을 보이며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으로 질문하십니다. 누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웃의 경계를 정해서 도와주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질문 하신 것입니다. 이웃의 경계를 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고,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생각하는 이웃이 이웃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고 그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옆집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와의 대화를 나누신 후 한 마을로 들어가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언니 마르다는 식사 준비하느라 분주했지만,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행동은 옳은 행동이고, 마르다의 행동은 나쁜 행동이라는 흑백논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바쁜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서 분주한 현대인들이 교정해야 할 마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마르다의 문제를 살펴 보면 마르다는 여러가지 일로 분주했고, 염려과 근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음식하는 일로 마르다를 나무란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기쁨으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는데, 많은 일로 그의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추측해 보면 예수님 한분만 그 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최소한 3명 이상의 제자들이 함께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음식만 준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음식을 준비하며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을 보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아무 일도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더 마음이 상했고,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도 마음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마음이 상했다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마치 마리아의 손을 들어 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마르다가 충분히 기쁨으로 섬길 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음에도 환경을 지배 받는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충고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한가지 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도와 줄 계산으로 많은 일을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원래 계획을 넘었고, 분주함에 마음을 빼앗겨 이 상황이 통제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흩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단은 옆에 있는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근심 (마음이 나뉨)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회복을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가정일, 직장일, 교회사역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해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하는데 급하다고 생각한 일이 치고 들어와 마음을 흩어 버리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1월 1일에 계획했던 일들이 뒤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중요한 한가지 일부터 한다면 회복횐 마르다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렉치오 디비나 - 양창삼 (아래의 글은 양창삼 목사님이 유진피터슨의 “이책을 먹으라”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유진 피터슨은 30년간 장로교 목사로 리전트 칼리지 영성신학부 명예교수이다. 그는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소유자, 절망하여 주저앉은 사역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목회자들의 목회자, 그리고 기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언어를 가진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회를 가리켜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로 보았다. 성경은 성경이 제시 하는 조건대로, 즉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읽을 것과 성경이 자신을 형성해 가도록, 즉 성경대로 살기 위해 성경을 읽을 것을 강조하였다.
“갖다 먹으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계10:9-10)는 요한 계시록의 말씀은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은 사건을 가리킨다. 요한이 책을 먹은 것이다. 이것은 독서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성경적 은유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그보다 앞서 책을 먹었다(렘15:16;겔2:8-3:3).
우리도 성경을 먹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이사야서에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 거릴 때에”(사31:4)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으르렁 거리다’는 히브리어는 ‘하가’(hagah)다. 이 말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의 ‘묵상하다’(meditate)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에 푹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는 말씀이 있다. 보나벤투라는 말한다. “많이 알되 아무것도 맛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자가 자기 먹이를 기쁨으로 맛보기 위해 으르렁 거리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맛보라. 글을 정확하게 읽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은 누구에게나 좋은 식사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성경(text)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성경에 의해 형성된다. 선불교의 공안(公案)이 아니다. 책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객관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건강함과 온전함, 생명력과 거룩함, 지혜와 소망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영적 작업이다.
피터슨은 텍스트로서의 성경, 형식으로서의 성경, 대본으로서의 성경을 말한다. 텍스트로서의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말하며, 형식으로서의 성경은 삶의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을 말하며, 대본으로서의 성경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말한다.
렉치오 디비나의 4 요소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거룩한 읽기’(聖讀)로 영적 독서를 말한다. 영적 독서는 음식이 우리의 위장으로 들어오듯 우리의 영혼으로 들어와 혈관으로 퍼져 거룩과 사랑과 지혜가 되는 독서이다. 그 말씀이 우리 삶의 내면이 되도록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리듬과 이미지가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말씀을 받아들이는 독서라는 점에서 참여의 독서이다. 이 독서는 우리의 삶을 살리는 이른바 ‘삶의 방식이 되는 독서’라는 점에서 엄청난 하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독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것을 험난한 훈련으로 생각해 ‘렉치오 디비나’라 했다. 그러나 이 성경 독서법은 성경이 기독교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그 공동체를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역사하는 독서, 능력이 있는 독서이다. 또한 성경 읽기를 통해 우리 삶이 하나님의 계시로 충만하게 된다.
렉치오 디비나는 크게 렉치오, 메디타티오, 오라티오, 콘템플라티오 등 4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1) 렉치오(lectio)
렉치오는 ‘읽는다’는 것으로, 텍스트인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은유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들, 숫양, 어린 양, 작은 산들, 이스라엘, 유다, 야곱, 그리스도 등 은유라는 창조적인 말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 은유는 연결성이라는 촉수를 사방으로 뻗힌다. 따라서 은유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유가 작동하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텍스트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메디타티오(meditatio)
메디타티오는 텍스트를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독서의 행위에서 기억력이 계속해서 활동하게 하는 훈련이다. 묵상은 공상이 아니라 영감 받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해 묵상한다.
묵상은 텍스트에 나오는 말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간다. 텍스트가 가진 배경은 거대하고 육중하며 포괄적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놀랐다(롬11:33). 이 텍스트를 우리 안으로 가져오면 그 텍스트가 우리를 그 안으로 데리고 간다.
묵상은 성경을 단편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되고 일관성 있는 전체로 읽도록 하는 훈련이다. 가장 전체적인 맥락은 예수님이며, 묵상을 통해 성경의 일관성을 더욱 깊게 파악하게 된다.
3) 오라티오(oratio)
오라티오는 텍스트를 놓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포사이스(P. T. Forsyth)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성경의 메시지에서 주시는 것에 우리는 기도로 이자를 붙여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읽고 기도하는 성경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연설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대화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그분의 대화 상대다. 나아가 기도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창조와 구원 그리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4)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
콘템플라티오는 “텍스트를 사는 것”이다. 흔히 관상(觀想)이라 하기도 한다. 관상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 텍스트를 나날의 일상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텍스트를 우리의 근육과 뼈, 산소를 만드는 폐와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관상은 그저 조용하고, 사람 만나기를 거부하고, 은둔하고, 고요하고, 온화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관상은 과거처럼 세상과 격리된 삶을 위한 서약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관상은 성경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허세부리지 않으면서 그것을 사는 것이다. 관상은 ‘읽다’와 ‘살다’가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요 주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fiat mibi)이다.
따라서 읽을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그는 “독자여 주의하라”(caveat lector)는 명령어를 사용했다. 예수님은 율법사를 향해 물으신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물음이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고 행하기 위해 읽으라는 것이다. 읽고 가서 행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읽은 대로 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자신에게 편리하거나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생을 축소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렉치오 디비나에 있는 이 네 요소는 서로 순차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요소 중 어느 것이든 언젠가는 제일 앞에 올 수 있다.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는 방법론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의 말씀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피터슨은 영성신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영성신학은 살아내야 하는 신학이다. 신학과 성경을 통해 진리를 표현한 후에 그 진리를 반드시 살아야 하고, 그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가 쓴 ‘이 책을 먹으라,’ ‘주와 함께 달려 가리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영성관련 저서들은 모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저 읽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사는 것으로 발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