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 성경말씀
토요일: 신명기 11-14장
주일: 신명기 15-17장
매일성경묵상
눅 16:14-31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에는 극단적인 삶을 산 두 사람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첫째 사람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 즉 당시 돈으로 살수 있는 가장 고급이고 화려한 옷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하루도 빠짐 없이 (날마다)호화로운 연회를 열었습니다. 그 집에는 대문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대문이 아닙니다. 보통 궁전이나 사원 같은 데 세워져 있는 높다란 기둥에 장식까지 달린 거대한 대문을 말합니다. 그의 옷이며 음식이며 집, 모든 것은 온통 돈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부자’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20-21절에 보시면,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여기서 예수님은 부자의 호화로움과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비참한 가난의 모습을 그려 주십니다. 거지는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 ‘누워’라는 말은 약한 번역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하면 내동댕이쳐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경멸과 조소를 온몸으로 받으며 거기에 그렇게 뻗어 있었습니다. 그는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대신 그의 등을 덮고 있던 것이라고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 되어 있는 상처들이 전부였습니다.
한사람은 재물이 있었고, 한 사람은 재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 두사람에게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극단적인 모습이 또 한가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재물의 유무와는 정 반대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있었지만, 부자에게는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입니다.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실 때 등장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신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번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굳이 거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내용의 흐름에는 별 상관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름이 갖는 의미가 재물이 갖는 의미보다 더 크기 때문에 거지의 이름을 부르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름’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이름이란 인격적 관계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나사로 와는 반대로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주민등록증의 이름이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이름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부자였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에서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은 없었지만 이름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나사로는 엘리사라는 이름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이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자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삶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재산은 있지만, 이름이 없었고, 또 한 사람은 완전히 빈털터리에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할지 자문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가운데는 그래도 나는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도.. 나는 부자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불공평한 삶을 산 것 같지만 두 사람 모두 공평한 순간을 맞이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피할 수 없었던 죽음 이후에 그들은 심판을 받았고, 심판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22-24절 입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오늘 이 말씀은 비유라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비유(parable)”란 단어는 희랍어로 parabolee인데, 그것은 “…의 옆에 던지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따라서 비유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병치(倂置)되는 것… 즉 은유.”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예수님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는 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다른 성경말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에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이 모습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하실 때 유대인들에게 퍼진 설화를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내세에 대해 묘사하는 세부 사항들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비유로 하실 때 더욱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부자건 가난한 자이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우리가 죽어가 가는 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려 함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부자처럼 산다면 우리는 분명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부자의 운명과 가난한 자의 운명이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분석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영적으로 묘사한다는 식의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부 그 자체가 부도덕하다는 암시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무조건 천국은 가난한 자들이 가는 곳이고, 부자는 무조건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나사로를 맞이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은 부자는 모두 악한 사람이고 가난한 자는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식의 해석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먼저,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청지기는 어떤 자들입니까? 재물을 잘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관리하는 것은 재물을 쌓아놓는 사람이 아니라 선한 목적으로 잘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재물 사용에 대한 말씀은 어제 묵상했던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우리가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한 사람의 결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 그를 자신의 친구로 만듦으로써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살면서 그런 기회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그는 나사로의 얼굴을 알았을 뿐 아니라 나사로의 이름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는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알면서도 자신의 부를 사용하는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의문이 생깁니다. 부자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간음죄를 범하거나,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님에도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바리새인은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머 나쁜 짓 한 거 있습니까? 내가 도대체 무슨 나쁜일을 했기에 지옥에 와야만 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교리적으로는 ‘아니요’입니다. 그 일로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확실한 사실은 예수를 영접하면 천국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천국 가고, 가난한면 천국간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최소한 부자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자처럼 혼자서 혼자만 혼자를 위해서 자기의 재물을 허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그 결과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비유의 말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말씀으로 다가 옵니다.
나는 나를 의지하는 부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했던 나사로인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